오늘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6호선을 타고 신당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환승하는 거리가 꽤나 멀어 까마득한 저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전기사정이 좋을 때 운행했던 콤베이너 에스카레이터를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말없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태연히 걸으며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방위가 헷갈려 지하철출구를 보는데
전철안내지도에 나온 14번출구는 저 건너편에 있다.
다시 지하에 들어가 철도원의 안내를 받고 다시 밖으로 나오는데
공원으로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공사중이라 쳐놓은 막(벽)이 끝없이 길어 가는 길이 막막하다.
애당초 걷기로 하고 나온 길인데도 불구하고 걷는 게 무서워지고
자꾸 먼 앞길만 신경이 쓰여진다.
워낙 서울운동장이 넓으니 그 둘레만 해도 만만치 않은 길을
걷다가 가끔 하늘을 본다.
높고 맑은 하늘은 내 마음을 위로해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거기에 시원한 바람까지 살랑댄다.
한국의 의류와 상업의 중심이 된 동대문상가는 옛날의 우중충한 옷을 벗고
활기차고 세련된 모습으로 하늘에 우뚝하다.
거기에 가을하늘과 구름이 어우러지니 얼마나 멋진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한 안내원이 건네주는 책자를 손에 들고 두리번거리지만 별 신통한 광경이 아니어서 실망.
서울운동장의 역사를 사진으로 전시한 것밖에는 없으니 그럴 수밖에.
책자를 본다.
그렇구나.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인 경성운동장이 건설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부러 경성운동장이 서울운동장으로 개칭
1946년...UN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우익은 축구장에서, 반대하는 좌익은 야구장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다고.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명칭이 바뀌고
동시에 종합운동장으로서의 대표적인 지위 또한 잠실로 넘겨줬다고.
좋은 정보이다.
2000년 동대문운동장 마지막 프로축구 경기가 열렸는데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성남 일화 천마에 1대0으로 승리를 차지하고
2004년에는 동대문 풍물시장이 개장되었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가 완료되고 2009년에 동대문역사공원 내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이 개관되었다는 사실 등.
이것이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의 개요이다.
밖으로 나오니 주위 경관이 좋은 것이 건물의 곡선과 자연의 선이 조화를 이루어서이고
나느 다시 동대문역사관으로 향한다.
동대문역사관이라고는 하나 서울의 역사관이나 다름없는 것이 서울얘기라서.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서울로 도읍지를 옮긴 후
세종4년(1422) 성곽을 전면 돌로 개축했다. 1월 농한기에 전국에서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축성했다는 성곽
이때 사망자가 872명이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서울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1895년 야간통행금지제도 폐지로 종각의 종은 정오와 자정에만 타종했다.
1899년 광무 3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 개통.
종로 거리는 전차 개통으로 도로개수사업과 종로 거리의 상권의 변동이 있었다.
1977년 강남고속터미널 건립으로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은 완전 폐쇄되고
2008년 동대문운동장 공사장에서 조선시대 유물과 아치형 수문시설인 이간수문 발견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이 개관되기에 이르다.
해방전에 태어난 나로서는 여기에 기록된 역사와 거의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것이 내가 자란 곳이 바로 동대문이기 때문에
동대문과 종로 사이의 왕래가 빈번했었다.
여학교때는 종로의 구정상회에 가서 수실을 사오기도 했고
성장해서는 종로5가의 광장시장에도 자주 갔었다.
아직도 내 기억에는 청계천 아래의 거지와 살모사를 팔고 있는 사람들이 역역하고.
옛날에는 四大門 안에 사는 사람을 양반이라고 했는데 지금에사 강남에 사는 사람이 우선하는 처지.
興仁之門 앞에서 목청을 돋우고 배뱅이굿을 부르던 이은관 선생의 모습도 생생하다.
오늘 핑게김에 동대문의 하늘을 싫건 보았다.
기쁨과 슬픔과 한을 안고 바라보았을 선조들의 눈길을 따라
나 후손도 오늘 동대문의 하늘을 보았다.
如如한 가을하늘을 보면서 사람도 닮아야한다고 읊조린다.
다리가 아플지언정 가슴이 탁 트였던 하루였기에
기쁨을 안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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