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이별이 아름답다
(원로 종교학자 정진홍 명예교수가 한 교회월보에 실은 글을 요약해 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가을도 그 풍요로운 들판도 거의 퇴색되는 계절입니다.
곧 겨울이 올 텐데 미루고 미루어 오던 긴 여행을 서두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 떠나시렵니까.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떠날 날 미리 정해놓지 않으신 것 잘 압니다.
이제까지 지혜롭게 가을 끝자락까지 오신 것 모르지 않습니다.
또 언젠가는 떠날 여행이기에 어느 정도 떠날 마련도 하고계시라 믿습니다.
하지만 떠날 날을 내가 결정할 수 없기에 답답하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살다보면 내일보다 모래가 좋고 내년보다 후년이 기다려지고 그러다 마지막 여행을 위해 괴나리 짐 챙기는 일을
잊기가 십상입니다.
아직 멀었으니까요.
때로 몸이 말해주고 마음이 느끼게 해주어 떠날 날 머지않았음을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이리 판단이 간사한지.
말과 느낌이 사뭇 착각인 듯하고 진실이라 해도 곧 아니게 될 것 같기만 하니 말입니다.
몸이 이제 말을 안 듣고 마음 또한 몸을 따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런데도 짐 챙겨 떠나는 채비하기가 왜 이리 귀찮은지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떠나야 마땅할 일이니 준비하고 기다려 언제라도 출발이 괜찮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꾸어 입으실 속옷 따로 간수하셨습니까. 와이셔츠도 바지도 다려놓으셨습니까.
이번엔 가족들 신세지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서랍 정리하셨습니까.
자질구레한 메모지들, 씨지지 않는 볼펜들, 곱상스럽게 아꼈던 귀한 것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그냥 가지고 있는 지저분한 것들.
이제 치우셔야죠. 언제 갑자기 떠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자칫 자식들이 보고 얼굴 붉힐 거리들은 없으신지요.
수첩 다 살피셨겠지요. 빽빽한 일정표 이제 소용없습니다.
하기로 작정하고 아직 못한 일들, 어서 해 치우든지 취소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셔야하지요.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은 채 떠난 친구들 참 우리 욕 많이 했지요.
약속 깨지고 신용 잃고 하던 일 망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떠난 친구는 편하겠지만 할 것은 서둘러 하고 못할 것은 서둘러 못한다고 해야지요.
아직 맺힌 것, 억울하고 분한 것, 섭섭한 것, 괴로운 것 있으십니까. 적지 않겠지만 풀으셔야지요.
날짜 여유가 없습니다. 후회된다고 하셨습니까.
사랑하지 못한 거요. 지금 하세요, 마음껏,
지금 못하면 영원히 하지 못합니다.
이제 짐 챙기고 마음 다듬으셨으면, 언제라도 자신 있게 떠날 준비가 되셨으면, 조용히, 정말 출발하시기 전에 나 자신을 용서하세요.
사느라고 애썼다고, 고맙다고, 나한테 말씀하시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마지막 여행은 내가 나 자신과 떠나는 여행이니까요. 그리고 그 여행 행복해야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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