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周泳(2014-07-05 22:17:26, Hit : 1174, Vote : 157
 최인호의 에세이 "인연"에서 "어머니의 유전자"

어머니의 유전자

우리는 잊었지만 어머니들은 잊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의 몸짓을 버릴 수 있어도 어머니들의 몸속에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몸짓이다. 그걸 나는 억척스러움의 유전자라고 부른
다.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키워오는 동안 어머니의 몸속에서 형성된 유전자, 십년이 지나도, 무려 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그 억척스러운 생의 유전자.



                           ***


돌아가신 어머니의 칠순 때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의 생신은 8월 10일 이었다. 다들 제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 고희연만큼은 거창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 복은 없지만 자식복은 있다는 소리를 듣게 해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형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며칠간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는데 정작 어머니는 아주 검소한 잔치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우린 조금 김이 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자랄 때부터 불효막심한 후레자식 노릇을 한 나로서는 이럴 때 톡톡히 생색 좀 내서 어머니의 한恨을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결심 또한  완강하게 굳으셔서  별수 없이 간단한 잔치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척 중에도 오직 어머니의 친동생이자 화가이신 외삼촌 내외만 부르기로 하고, 장소는 J호텔 요식부의 한 방을 예약해 두었다.
12시 30분, 우리는 정확히 약속 장소에 집결했다.  삼촌 내외는
벌써부터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는데 우리를 보자 외삼촌이 익살을 부리셨다.
“잘 먹을 것 같아서 하루 전부터 굶었어. 만약 너희가 이틀 전에
연락해 주었다면 이틀은 굶었을 거야“
어쨌든 이렇게 해서 20층이 넘는 호화 호텔 꼭대기의 한 방에
자리를 잡고 어머니의 예순아홉 살 파티를 시작했다. 접시에 접어놓은 냅킨을 하나씩 무릎 위에 드리우고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생신을 진정 축하해서 못 견디겠다는 엄숙의 표정을 과장하고 있었고, 아직 철모르는 아이들조차 분위기에 압도되어 마치 수녀원에 갇혀 엄격한 예절교육을 받은 아이들처럼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으며, 어머니는 빨간 매니큐어 칠한 손으로 파티의 개막을
선언 하셨다.
마침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호텔 사진사를 불렀으나 막상 사진사가 오자 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십분 후쯤 다시 와주겠어요? 왜냐하면 테이블에
접시라도 좀 가득 있었으면 하니까요. 그래야만 사진이 그럴듯하지 않겠어요? “
후덕한 인상의 사진사는 정확히 십 분 후에 다시 오겠다며 나가
버렸고 결국 음식이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중국 음식이라면 자장면과 우동밖에 모르는 아이들은 차례로  들어오는 음식이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왠지 장난감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먹으려 들지 않고 장난만 하고 있었으며, 아내는  후다닥 먹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눈치였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침만 삼키고  젓가락질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차차 무르익자 빈 접시도 쌓여가고 아이들도 먹고 흘리고 소리 지르고 던지고 외삼촌도  술 한 잔에 마음이 풀리셔서
말씀도 많아지고 며느리들도 체면 차리지 않고 먹기 시작하고 사
진사가 들어와서 “카메라를 의식치 마시고 그냥 드세요. 마음껏 드세요” 하며 사진 찍고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지고 이십층 꼭대기에서 밖을 내다보니 눈 아래 사람들이 개미 같고 차들이 성냥갑 같고 물도 꿀꺽굴꺽 먹고 그러다가 입가에 흘리고 배도 불러오고 아이 중의 하나가 변소 갔다 오겠다고 나가서 오줌 싸고 오더니 너도나도 긴장이 풀려서 변소 한번 다녀온 뒤부터는 비로소 마음이 느긋하게 풀리고  진짜 어머니의 생일파티가 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내 옆에 앉으신 어머니가 주섬주섬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무언가 유심히 보니 비닐봉지였다.
“뭐예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소녀처럼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남은 게 아까워서 그런다. 여기다 남은 것 싸다가 집의 개라도 주려고 그런다.”
어머니는 탁자위에 남은 음식들을 미리 준비했던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기 시작 하셨다.
“빨리 먹지 않으면 보이들이 접시 째 들고나가지 않데”
나는 난처해서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이러다가 종업원이라도
들어오면 어쩔 것인가. 모처럼 만든 이 신성한 파티 의식이 마구잡이 동네잔치로 전락되어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거참,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주책 부리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를 높이자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그러나 마음은 급하고 비닐봉지에 남은 음식은 잘 들어가지 않고 손은 떨리고 그러시더니 마침내 그 아까운 새 입성에 국물을 조금
흘리셨다.
“아까워라”
혼잣말로 어머니는  치마에 묻은 국물을 냅킨으로 닦으시며 중얼거리셨다.
‘옷 버리고 말았네.  호호. 참내 난 도둑질은 못하겠어. 손이 떨리고 맘이 떨려서“
그렇게 어머니는 천진하게 웃으며 계속 음식을 담으셨다. 주름진 얼굴 피부에 곱게 분을 바르시고, 새로 맞추신 한복으로 벌겋게 물드는 음식국물에도 아랑곳없이 음식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검은 비닐봉지에 담으셨다.
오랜 옛날 우리는 가난했다. 가난해서 끼니를 굶고 거르는 날도 많았다. 우리가 한 끼를 굶으면 어머니는 두 끼를 굶어야 했으며, 우리가 한 끼를 먹으면 어머니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표정을 짓던 시절이 정말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그 시절을 망각했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잊지 못하고 계셨구나.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숱한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니의 몸속엔 여전히 그 시절의 억척스럽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수많은 자식들을 치마 품에 안고 견뎌낼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저 억척스럽고 남부끄러운 주책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짓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성이라는 주책인 것이다.

어머니, 더 많이 담으세요.
음식 하나 남기지 마시고 더 많이 그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우리들 꿈속으로 가져다주세요. 한 개도 남김없이 다.
어머니가 남의 부끄러운 이목도  상관 하지 않고 담아 오신 그 음식들을 우리가 다 먹을래요.
어머니. 이제  늙어가는 자식들의 꿈속으로 검은 비닐봉지 두둑이 음식을 담아 오세요,  어머니



李明淑 (2014-07-07 22:44:39)  
잘 읽었습니다. 지금 (저확치는 않으나) 어머니께서 100세 언저리 되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69때생신 파티 얘기이니 30녀전 얘기네요. 그때의 우리네의 살림이 다 그랬으니 저도 많이 공감합니다. 훌륭한 어머님
鄭周泳 (2014-07-10 14:53:50)  
최인호 작가와 아주 흡사한 경우를 저도 경험했었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를 아니 우리세대의 어머니들을 색각하며
올린 글입니다. 공감해 주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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