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周泳(2013-12-06 19:48:03, Hit : 1166, Vote : 196
 膳物이 先物이 되어서야

膳物이 先物이 되어서야
2013.12.06



연말이 가까워 오면 어려서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곤 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친척 집에 찾아가면 어른들이 주시는 뜨듯한 떡국을 먹으며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곤 했지요. 또 성탄절에 덩달아 마음 설레던 기억도 스쳐갑니다. 이런 단상 중에 빠지지 않고 생각나는 풍경이 있습니다.

필자가 1960~197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살던 때입니다. 독일의 금융 중심 도시라 교통 시스템이 비교적 잘되어 있었는데도 대학병원을 끼고 다섯 개 찻길이 교차하는 혼잡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길목에 출퇴근 시간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50대 중반의 교통경찰이 나무 단상 위에 서서 손으로 교통정리를 했습니다. 그는 호루라기도 불지 않고 그저 일정한 시간마다 몸의 방향을 90도 돌리면서 가끔 양팔을 가볍게 움직였습니다. 운전자는 그의 가슴이나 등을 보면 차의 속도를 줄였다가 정차했고, 그의 측면 어깨를 보면 교차점을 건너가곤 했습니다. 어쩌다 차가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는 선에 들어서면 그의 한쪽 팔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운전자에게 조심하도록 사인을 주면서 다른 팔로 방향을 가리키는데, 운전자가 그 방향으로 서서히 지나가면 그는 운전자와 웃음 띤 눈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쩌다 운전자가 실수라도 하면 그의 입은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눈으론
엄중히 ‘야단치는’듯했지요. 훗날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교통경찰은 그곳에서 정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다가오면 그의 주변에는 ‘선물(膳物)탑’이 세워집니다. 지나가던 차의 운전자들이 너도나도 와인병이 담긴 쇼핑백이나 예쁜 색상의 리본을 두른 상자를 그에게 건네곤 했습니다. 그가 받은 膳物이 수북이 쌓이면서 아주 특별한 탑이 조성됩니다. 더없이 아름다운 마음을 전하는 膳物의 조형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물’ 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단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무렵 필자가 담당하던 병실에 일본 사람이 입원했습니다. 서로 동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습니다. 그는 낯선 이국땅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필자를 만난 안도의 기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만나 한 5분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정성스럽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필자에게 건네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곁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소하고 당혹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膳物이라는 느낌보다 상대방의 호의를 미리 예약하는 부탁 목적의 先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하는 환자가 고마운 마음으로 건네는 작은 선물은 치료에 대한 긍정적 반응의 표현으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의사는 그때 전해오는 환자의 잔잔한 마음에 나름 보람을 느끼며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치료도 시작하기 전 미리 받는 先物이라 너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외국으로 장기 연수를 떠나는 제자에게 초청자와의 첫 만남에서 부담스러운 선물을 건네는 것은 신중해야 하며 삼가라고 당부하곤 합니다. 연수를 마치고 떠나올 때 그간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물이라고 덧붙이면서요.

우리 사회에는 듣고 보기 민망한 크고 작은 각종 비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네 자존심이 여지없이 괴멸당하는 생각과 함께 수치스러움마저 느껴 분통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비리 뿌리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膳物과 先物’에 대한 개념 정리가 잘못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물의 ‘선’자가 좋은 음식을 고마운 마음으로 드린다는 뜻의 ‘膳’자로 시작하는 선물인지,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는 ‘先’자로 시작하는 선물인지 확실히 분별하며 선물을 주고받는다면 이러한 혼탁한 현상이 어느 정도 예방될 듯도 싶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된다면 프랑크푸르트 교통경찰처럼 국민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수고하는 이에게 전하는 수많은 운전자의 선물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의 膳物이고, 시쳇말로 꼼수의 마음이 스며 있는 것은 先物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헌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것을 과감히 받아들인다(送舊迎新)‘는 뜻을 반추해보는 것은, 진정한 膳物만이 유통되고 정이 넘치는 밝은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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